가담항설
가담항설街談巷說
몇 년 전에 썼던 자컾 로그 백업
안휘의 거리를 혼자 걷는 정현을 보는 것은 제법 드문 일이었다. 그의 곁에는 늘 여가 함께했으며, 만일 그녀가 없다면 다른 남궁가의 자제들-보통 이제 가족 될 창천검의 두 동생-이 검괴의 양옆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괴가 홀로 저잣거리를 둘러보는 모습은 매우 귀한 광경이었다. 지금 정현이 홀로 안휘, 그중에서도 남궁이 위치한 합비의 시장가를 걸어 다니는 이유는 그저 같이 나왔던 남궁여가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창천검대의 일원 중 한 명에게 붙잡혀 갔기 때문이었는데, 곧 상공 될 사람이랑 함께 할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여는 불쾌했던 것인지 아주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며 금방 일을 끝내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시력이 퇴화한 만큼 다른 감각이 발달한 정현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는데, 여는 그의 앞에서와는 달리 짜증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이리 다급하게 날 부른 거지? 저… 부대주님. 혹시 화라도 나신, 잘 아는군.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도록 하게. 넵! 정현의 입술 사이로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름 모를-그러나 남궁의 성을 쓰고 있을- 대원도 참 안된 일이다. 그러게, 누가 하필 며칠 동안 온갖 일에 시달리다 겨우 해방된 사람을 방해하래? 정현은 만일 자신의 (전) 사제가 여와 단둘이 저잣거리를 구경한다든지, 아무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방해하면 무슨 행동을 했을지 생각하지도 않고 큭큭 웃다가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낯으로 돌아왔다. 멀끔하게 생긴 사내가 짧은 시간 동안 그리 다양한 모습을 보이니 주위의 시선이 정현에게 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느긋하게 합비의 거리를 돌아다닌 적은 없는 데다가, 여가 없으니 그녀에게 줄 물건을 고르기에도 적절한 시기일 테다. 여에게도, 그 이름 모를 창천검대의 아무개에게도 미안하게 되었으나, 조금 오래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다. 제 여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 당연했으니까. 정현은 주위를 빙 둘러보다가 장신구를 파는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장 계십니까?”
“어서 오십쇼, 공자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의자에 반쯤 늘어진 채 시간을 보내던 상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좌판에 가까이 와서야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그는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검괴, 아니 아니, 류 대협 아니십니까. 창천검께 드리는 선물이라도 보시는 겁니까?”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대신 창천검 앞에서 그리 부르면 아마 고운 시선은 보지 못할 테니 조심하시고.” 정현은 장난스레 대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유행하는 것이나 그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보여주겠습니까?”
정현의 말에 상인은 안도의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좌판 위에 놓은 것을 쭉 훑어보았다. 이것은 남궁 성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모자라고, 이것은 푸른 옷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푸른 것을 몸에 자주 걸치는 그들은 보통 금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하곤 했는데, 창천검에게는 그런 노오란 빛깔은 아주 쥐약이었다. 화려한 것도 피해야 했다. 화려한 금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하면 그 새하얀 낯은 병자의 것처럼 창백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고, 모든 시선은 장신구로 향하고 말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지독히 안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국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찾지 못한 상인은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제아무리 귀인이라 한들, 오랜 시간 장신구 및 귀금속을 다루던 상인으로서 손님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 분명한 물건을 추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검괴는 제법 높은 미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하니-검괴가 안휘에 온 이후, 호북에 있던 상인에게 건너건너 들었다- 잘못 추천했다가 손님 끊기기 딱 좋았다. 상인은 이런저런 것을 잔뜩 살펴보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지금 있는 것 중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협.” 아쉬운 듯 미간을 구기며 말하던 상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대신,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말해주시지요. 제가 발품을 팔아 좋은 물건을 찾아보겠습니다.”
상인의 포부와도 같은 말에 정현이 눈을 깜빡였다. “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협. 제가 찾아드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반지는….” 상인은 정현이 끼고 있는 반지를 한 번 보고 시선을 돌렸다. 저 위치라면 혼인을 앞둔 정인들이 나누어 끼는 곳이니 분명 창천검의 손에도 같은 모양의 반지가 자리했을 테다. “그렇다면 귀걸이나 목걸이는 어떻습니까? 검파에 다는 술도 좋겠지만, 그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거나 대협께서 직접 만드시는 것도 좋고…….”
“아니, 다른 가게를 조금 둘러봐도 괜찮은데.”
“제가 좋은 상단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럽디다. 장명쇄長命鎖는 어떠십니까? 어린아이들에게 주는 것이긴 하지만, 은이나 옥으로 된 장명쇄를 선물하는 것이 제법 인기여서요. 전쟁이 끝나긴 했지만, 두 분 다 검을 잡으시니 다른 이들보다 죽음에 가까운 분들이 아니십니까. 본인의 수명을 이렇게 자물쇠로…….”
상인은 한참 말을 잇다가 정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도사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다녔다 하는데, 지금은 왼손 약지에 낀 가락지 하나를 제외하면 별다른 장신구가 보이지 않았다. 둘이 짝을 맞춘 장신구가 있다면 분명 지금 반지를 낀 것처럼 달고 다녔을 터이며, 아직 안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대로 무언가를 맞춘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남궁에 줄을 대고 있는 윤 씨가 말하길, 남궁에서 혼인 이야기가 들려온다고 하니, 혼례를 준비하느라 바쁜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전에 주고받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테다. 안휘의 좋은 목에 자리 잡아 오랜 시간 귀금속을 다루는 상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좋은 것을 골라주어야겠다. 생각을 마무리한 상인이 정현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전에 서로 주고받은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두 분께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알면 추천하는 데에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반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종류에 크게 생각하지 않고 추천해줄 수 있겠습니까?” 정현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상인은 그 말에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하긴, 몰래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흔적을 남기면 안 되는 법이죠.”
“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린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알리려는 듯 길거리에 심어진 나무에도 색색의 꽃이 피었다. 다양한 색채로 물든 거리에 도사린 불안을 훈훈한 공기가 흩트려놓을 즈음에야 안휘에 사는 이들도 하나둘 꼭꼭 닫아두었던 창을 열었고, 바깥으로 나와 따스한 햇볕을 즐겼다. 젊은이들은 요즘 즐거운 소식 없냐며 나가서 연애라도 하라는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마음에 품어 두었던 사람의 집으로 매파를 보내기도 했다.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즐겁고 분홍빛 머금은 소문에 안달이 난 사람들의 귀에 창천검의 봄 내음 잔뜩 묻은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그것을 숨길 생각이 있었는지 묻는 것이 빠를 테다.
종전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품었던 이를 손에 넣은 여는 서른다섯 해 동안 놀지 못한 것을 한 번에 놀기라도 할 셈인지, 세필 대신 정현의 손을 잡았다. 맨 처음에 정현은 저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냐 걱정했으나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는 다 하고 있다는 여의 말과 혼인을 앞둔 젊은-혼기를 꽉 채우다 못해 훌쩍 넘겼으나- 남녀의 시간을 빼앗을 정도로 저들이 쩨쩨하지는 않으니-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좋은 시간 보내라는 남궁 어른들의 단호한 말에 죽여주게 즐기겠노라 다짐하며 마주 잡은 여의 손을 이끌고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밟았다. 그녀는 연고라고는 자신 하나밖에 없는 제 애인과 손바닥을 딱 붙이고 평소보다 배는 느긋한 걸음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온기 가득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해주곤 했다. 합비의 거리를 걷다 보이는 찻집이나 다과를 파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곳에서 어릴 적 제 외조부 되는 사람이 당과를 사서 입에 물려줬다거나. 포목점을 가리키며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나 또 수수하지는 않아 종종 들르곤 한다거나. 정현은 여가 평소보다 한결 풀린 표정과 목소리로 설명해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입 모양으로 짧게 되뇌곤 했다. 아무튼, 그들이 향하는 곳이 단순히 합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여가 일을 빠르게 끝마쳐 며칠 간의 여유가 생기면 두 사람은 안휘의 남쪽으로 내려가 장강을 내려다보며 술잔을 기울였고, 둘 다 무인이면서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핑계로 객잔을 잡아 하룻밤 묵기도 했다. 물론 정현은 유교에 기반을 둔 남궁의 어른들께 혼나는 것은 아닌가 다시금 걱정했고, 여는 바짝바짝 타는 정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만 잡고 자겠다며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을 해 심란함을 더했다. 아주 놀랍고 또 놀랍지 않게도, 두 사람은 정말 손을 잡고 서로 끌어안고 자기만 했다. 정말로.
그래서 여기까지 길게 이야기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안휘에 적을 둔 사람은 물론이요, 다른 지역에서 안휘에 잠시 들른 사람까지 전부 창천검과 검괴의 연애담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창천검은 순찰을 명분으로 삼아 제 정인과 같이할 시간을 늘리곤 했으니, 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르겠는가. 게다가.
“아여, 이리 와 보게!”
“뭐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건가?”
“원래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님세, 얼른 와 봐. 내 보여줄 것이 있어.”
여는 정현의 말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그리 다급하게 부른 건가. 하고 물어볼 새도 없이 정현의 손이 여의 머리로 향했다. 그녀의 시야에 드리운 그림자에 여가 눈을 질끈 감자 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높은 온도의 손이 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의도하지 않은 양 드러난 귀 끝을 가볍게 스치고 떨어지면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정현은 이럴 때마다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애석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예상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흐릿한 시야에도 새벽녘의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화장기 없는 하얀 피부가 누군가 붉은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붉어지는 것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렇지만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미묘하게 커지는 눈이라던가, 그 청회색 눈동자가 요동치다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것을 제 망막에 새기지 못하는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여는 제 시야에 드리운 그림자가 멀어지자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정현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제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것이 느껴져 몇 번 그 주위를 건드리는 모양새를 바라보는 정현의 붉은 눈동자에 애정이 넘실거리더니, 그 위에 장난기가 덧씌워졌다. 여는 제 귀에 자리한 것을 조심스레 빼내어 확인했다. 하얀 꽃 한 송이였다. 그에게 무언가 말하고자 시선을 들면 정현은 또 어느샌가 훅 거리를 좁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자네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어때, 오늘 하루 귀에 꽂고 있어 주면 안 되나?”
“……아현.”
“물론 안 되겠지. 농일세. 자네에게도 체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 그리 진지한 얼굴로 받아들이지 말게.”
정현은 장난스레 말을 끝마치고는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 거짓인 것마냥 훌쩍 멀어지고는 멍하니 서 있는 여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마저 설명해주겠나? 내 자네가 다른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살 게 될 터인데, 어디에 무엇이 있는 줄은 알아야지.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즐겁지, 자네는? 그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나는 당황하게 할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이런, 내가 한 방 먹었군.
이런 애정 행각을 길 한복판에서-물론 한복판은 아니고 나름대로 인적 드문 곳이었지만, 중원의 젊은 영웅인 두 사람은 저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벌이고 있으니 여와 정현이 정을 통했으며 남궁에서 흘러나오는 혼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저 두 사람임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비밀 연애니 뭐니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겠지만, 두 사람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이고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는 소리다.
사실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여와 정현은 좋은 의미로 세인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다. 소가주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평가되는 창천검 남궁여와 한 번 죽었다 깨어나 고강한 무위를 뽐내는 검괴 류정현이 천마의 목을 베고 중원에 평화를 이룩한 젊은 영웅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말이다. 정현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부터 ‘무당파의 괴상한 놈’이라는 뜻을 담은 무괴라는 별호가 붙고, 그 잘난 얼굴답게 성격을 곱게만 쓰면 뭇 여성들을 상사병에 밤잠 못 이루게 했을 것을, 경망스러운 성격 탓에 여인들보다 같은 사내에게 더욱 인기가 많다는 말도 돌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의 경망스러운 성격에 설레어 잠 못 이루는 이들도 존재했지만. 아무튼,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이 남자가 도문에 들어가 대의를 위해 한 번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고, 그 뒤로도 죽음을 두려워 않고 또다시 전쟁에 나가 무사히 제 발로 귀환했으니, 호북에서 정현의 인기가 나날이 더해졌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궁여는 어떠한가. 사실 남궁 가주의 조카라는 것 하나만으로 안휘에서는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워낙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과 저 드높은 남궁의 담을 타고 넘어오는 흉흉한 소문에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었다. 허나 정마대전이 발발한 이후 여가 세운 공적은 타인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안휘성에 위치한 옥에는 온갖 흑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이겠는가. 창천검 남궁여에 대한 소문이 좋아지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렇게 타인의 이목을 끄는 이들이 보란 듯이 나란히 붙어 다니고, 또 같은 위치에 가락지를 끼고 있으니 안 그래도 즐거운 소식이 필요했던 양민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거리에 나타나면 연신 힐끔대곤 했다. 남궁과 연이 깊은 합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제는 다들 익숙해졌다 한들 둘이 칠주야에 한 번가량 저잣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으니 말이다.
“아여, 잠시 이쪽으로.” 정현이 마주 잡은 여의 손을 이끌었다.
“이번에도 또 시답잖은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내가 하루 온종일 장난이나 치는 줄 아는감?” 정현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정현은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여는 쩔쩔매는 듯한 그 붉은 눈동자를 잠시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자, 그래서 어디로 가려던 거지?”
입과 행동으로는 웃으면서 정작 여는 웃는 눈으로 정현을 바라보았다. 그 모양새에 정현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만다. 아여, 자네는 말이야.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그렇게 치고 들어온다니까. 이렇게 말하는 정현도 목덜미를 살짝 붉힐 뿐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녀를 이끌고 자기 눈에 들어온 상점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시선을 사로잡는 두 남녀가 풋풋한 사랑 놀음을 하는 것은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게다가 늦은 나이까지 시집을 가지 않은 세가의 아가씨와 소문이 썩 좋지만은 않던 무당파의 전 도사라니. 안 그래도 무림인을 주인공으로 한 염정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림 고수들의 연애를 직관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신분의 고저를 불문하고, 두 사람이 거리에 떴다 하면 온갖 사람들이 달려 나와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초반에야 귀한 영물 보듯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아닌 척 연기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아 두 사람이 어느 가게에 들어가거나, 다른 곳으로 향한 뒤에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검괴는 날이 지날수록 헌앙해지는 것 같다느니, 창천검은 인제 보니 제법 미인이라느니. 둘의 외관부터 시작하여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리고 종내에는 이야기의 빈칸을 저들끼리 기워나가기 시작했다.
“저 두 분은 어쩌다 만났을까?”
“역시 그, 10년 전에 뭐더라… 학사맹원 아니겠어? 조금 늦긴 했다만 그 나이면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한창때의 젊은 남녀가 붙어 있으니 당연히 마음이 싹트기 마련이지.”
“예끼, 이 사람아. 무인 분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과 같은 줄 아는감? 우리야 외간 남녀가 손등이라도 스치면 인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인 분들은 하루 온종일 수련하시면서 손을 잡기도 하고, 등을 마주대기도 하고 같이 등목도 하는 사이 아니던가.”
“그래도 아가씨는 그때까지 가족을 제외하고 사내를 얼마나 많이 만나 보았겠는가? 혼담이야 제법 들어간 것 같았지만 대체로 가주님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검괴… 아니 류 공자께서는 도사였고. 명문에서는 어릴 때부터 입문을 받아 고수로 키운다니, 그분도 여인을 많이 못 만난 건 매한가지다 이 말이야.”
그렇게 두어세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사람은 배로 불어나 각자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종류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갈등하곤 했는데,
“무슨 소리. 학사맹원 때에는 서로 관심은 있었을지언정 정이 통해 연인이라 부르지는 못했을 테야!”
“거참, 류 공자께서 도사만 아니었어도 이미 슬하에 자식이 둘이었을걸?”
크게 이 두 갈래였다. 그 안에서도 정현이 먼저 좋아했을 것이다, 아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소리도 모르냐, 여 쪽에서 먼저 좋아했을 것이다, 이런 세세한 사항으로 여러 부류로 나뉘곤 했지만 크게는 이 두 가지 가설이 세간에서는 가장 유력한 것으로 떠올랐다. 서로 제 말이 맞고 네 말은 틀렸다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한 가지 변동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전쟁을 통해 둘의 사이가 발전하는 와중에도 정체되어 있었을 것이다, 라는 대전제였다. 이 한담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부류는 그건 모든 분야에서 다 그렇지 않으냐 질문할지도 모르나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 두 사람이 자주 가지 않는 객잔에 붙잡혀 일장 연설을 듣고야 말 것이다.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 건데 사람 마음이란 갈대와도 같아서 말이야, 로 시작되는 말은 전쟁통에 서로가 있을 곳을 바라보며 제 임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같은 곳에 서서도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며, 눈이나 몸이 맞는 것이 아니라 검을 맞대어야 하는 그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하냐! 라며 대낮에 술 한잔 걸치지 않고서도 잔뜩 높아진 언성으로 끝날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마찬가지로 양민들은 여와 정현이 들어간 포목점 쪽을 연신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아무튼, 마교 놈들이 잘못이라니까. 전쟁만 아니었어도 자식이 둘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쟁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가슴 앓을 일은 없었을 텐데.” 방앗간 주인이 혀를 쯧쯧 찼다.
“자네 무언가 들은 것이 있는 모양이군?” 그의 말에 누군가 반응하자 방앗간 주인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창천검께서 보통 강한 사람인가? 남궁진 대협께서 돌아가셨다고 그리 무너지실 분이 아니라고. 전쟁통에, 가족이 죽었다고 검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단 말일세. 책임감도 강한 분이시고. 그렇지만 제 어머니에 더해서 마음을 주었던 사내까지 같은 전투에서 죽었으니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 년간 처소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지. 분명 그사이에 마음도 정리하고, 수련으로 심신을 안정시킨 것이 틀림없네. 류 공자께서는 부상에서 회복하셔야 했고, 살아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렸으면 몸이 채 낫기도 전에 전장에 서게 되었을 터이니 숨겨야 하지 않았겠는가? 전쟁만 아니었어도 참……. 두 분 다 욕보셨지.”
방앗간 주인의 추론은 제법 그럴듯했다. 만일 정현이 옆에 있었다면 천기누설 같은 거냐 혹시 집안 어르신 중에 미래를 보는 사람-정확히는 과거겠지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쳤을 만한 그 추측을 다른 이들도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몇 번 주억이고는 한두 마디 붙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둘이 서로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그리 마음을 졸였겠는감? 무슨 소리.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애타는 거야. 차라리 연인이었으면 다치지도 죽지도 말라고 끌어안고 속삭일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일리 있는데?
삼인성호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다섯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창천검과 검괴는 이미 십여년 전부터 정이 통하여 10년 동안 가슴앓이하던 전쟁이 갈라놓은 비운의 연인이다, 라는 말을 주장하는데. 사람들이 어찌 믿지 않고 배기겠는가? 오히려 한술 더 떠 그런 두 사람이 전쟁이 끝나고 각자의 지역이 안정된 이후에야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아직 혼인 소식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중원의 홍복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렇지만 말이 길면 꼬리가 잡히는 법. 합비를 넘어 안휘 전역에서 밀고 있는 두 사람의 연애담은 서로에 집중하는 두 사람의 귀에도 들어갔다. 사실, 정확히는, 그것을 들은 창천검대의 대원 중 하나가 다른 평대원들에게-놀랍게도 창천검대 검대주까지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이야기해주던 것을 여를 찾으러 왔던 정현에게 들켰으며. 그래서 우리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돌고 있느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그에게 약관이 조금 넘은 평대원이 조금 주저하며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래서, 안휘에서 무슨 말이 돌고 있냐면 말입니다, 음, 당고모부, 아니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그냥 편히 공자라고 부르게. 그래서, 무슨 말이길래 그래. 얼른 말해봐.” 정현은 가볍게 호칭을 정리하고는 웃으며 턱을 괴었다. 붉은색 눈동자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내 한 때에는 창천검 말고 다른 여인과 정이 통했는데 바람났다던 소문이 돈 사람이야. 무엇이라 한들 크게 신경 쓰지 않네.”
정현의 말에 그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두 분께서 전쟁이 갈라놓은 비운의 연인이 되어…….” 그는 말문을 열었으나 진짜 이런 말을 해도 되는가 고민하며 계속 정현을 힐끔댔는데, 별다른 반응 없이 즐거이 듣고 있는 모양새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어렸기에 잘 모르지만, 학사맹원 제도로 두 분께서 처음 만났을 때 정이 통했고. 연인이라 서로를 규정하지만 않았지, 그에 준하는 관계였는데 전쟁에 의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정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무튼, 죽음과 전쟁마저 갈라놓지 못했던 사랑이 십 년 만에 그 결실을…….” 평대원의 말이 끝나갈 즈음에는 웃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킥킥 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아무리 도사 같지 않아도 그렇지, 내가 도사였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었던 모양이군?”
“원래 금지된 것에 더욱 끌리는 법 아닙니까, 형님.”
제삼자의 목소리에 정현은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인지 여와 그의 동생인 남궁단이 나란히 서 있었다. 단은 즐거운 듯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를 대신했다. 정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맞는 말이지. 그나저나, 일은 다 끝난 건가?”
“물론입니다. 중한 사안도 아니었으니 누님을 데려가시지요.” 단은 그리 말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옆에 서 있는 여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인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단은 그런 제 누이를 힐끔 바라보고는 눈을 내리 감으며 입을 열었다. “누님이야 연정을 소재로 한 소설에 관심이 없으시고, 형님께서도 마찬가지일 듯하니 하나 말씀을 올리자면. 주인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가의 여식, 두 번째로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검을 잡은 무인.”
“아여는 둘 다 해당하는군?” 정현이 가벼운 말투로 끼어들자 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일단 가보라는 듯 평대원을 향해 턱짓하자 불쌍하게 현 남궁의 젊은 권력자 사이에 끼어 있던 그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헐레벌떡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첫 번째, 돈 많고 무력 짱짱한 남자. 두 번째로 종교에 귀의하여 연정 같은 오욕칠정을 멀리해야 하는 남자. 놀랍게도 우리 형님께서는, 돈은 몰라도 무력으로는 비할 데 없으며, 명망 높은 도문인 무당의 도사셨죠. 지금은 하산하셨지만.”
단은 부채를 접어 탁 하고 제 손바닥을 내리쳤다. 정현은 그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와 아여가 소설 속 주인공의 도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니, 제법 웃기지 않은가. 여는 누가 봐도 과장되게 끅끅대는 정현의 모습을 잠시 시야에 담다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인기 있는 도식의 두 사람이 때늦은 연애를 하는 것에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온갖 말을 지어내서 저들은 모르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전쟁이 갈라놓은 두 인연이 다음 생이 아니라 이번 생에서 이어질 수 있어 다행이라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난 이야기에 머리가 지끈댔다. 창천검 남궁여는 저를 둘러싼 이러한 종류의-연정이든, 혹은 긍정적인 것이든- 소문에 익숙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니 그냥 두어도 괜찮겠지.”
“물론이지요, 누님. 그리고 형님께서 이리 환영받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사실과 조금 달라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유 모를 냉혈한이라는 소문도 깰 수 있고. 안 그런가, 처남?”
“그럼요, 형님. 이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 경우는 누이 좋고 매형 좋고 아니겠습니까.”
죽이 잘 맞는 두 남자의 만담에 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아니 이 경우에는 소가주께서 연관되지 않으셨을 리 없겠군. 혹시 나 몰래 몇몇 이야기를 흘리고 다닌 것은 아니겠지? 여의 질문에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현이야 거의 모든 시간을 그녀와 보냈으니 결백하고, 남궁단은 구태여 말을 내뱉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시금 부채를 촤악 펼쳐 제 입을 가리고는 즐거운 모양새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것과 꼭 닮은 청회색 눈동자가 반으로 접혔다.
“누님, 원래 이런 건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랍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데요. 나중에 또 다른 이야기가 생기면 금방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즐기라는 말이겠지.”
“그럼요. 어디 사는 누가 두 분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안휘 사람들이 누님과 형님을 좋게 보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단은 입을 가린 부채를 내리지 않은 채 말을 끝마치고는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가볍게 제 집무실로 향했다. 사람으로 바글댔던 연무장에 순식간에 텅 비고 여와 정현만이 남아있었다. 여는 제 남동생의 뒷모습을 잠시 흘겨보다가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정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 즐거운가?”
“암. 그렇고말고. 웃기지 않은가? 전쟁이 갈라둔 사랑이라니. 내가 도사인 것도 까먹고 말이야. 아무리 그런 부류의 연정 소설에서는 사랑에 빠진 도인이 하산하는 것도 많다지만 내가 그 당사자가 되다니, 기분이 아주 색다르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자네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고.”
“……자네가 즐거우면 됐지.”
“왜, 자네는 안 즐거운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게다가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정현은 여러 의미로 복잡한 듯한 여의 얼굴을 보고 말을 툭 내뱉었다. 잔잔한 파문이 일던 연못에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라는 큰 돌을 냅다 던진 그는 천천히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무구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얄미운 얼굴에 눈을 흘기다가도 결국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여는 정현의 옆으로 다가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쳤다. 간지럽다는 듯 킬킬대는 모양새에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던 냉랭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말인데, 아여. 그리 즐겁게 우리 이야기를 떠드는 이들에게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
“놀러 가자는 말이로군?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있나?”
“호수에 가서 뱃놀이를 즐기는 것은 어떤가? 향 좋은 술과 자네만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난 자네에게 나와 하는 신선놀음이 수련보다 즐겁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어야겠어.”
“까먹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혼인을 앞둔 사이야, 아현.”
“그래서, 싫은가?”
“아니, 좋아해.”
가볍게 대답한 여는 정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숨을 내쉴 때마다 목덜미가 간질대는 느낌에 정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좋은 향에 정신이 아득해지기 직전 그녀가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지금 가면 해지는 것을 볼 수 있겠군. 얼른 가자, 아현. …자각도 없이 이러는 거라면 조금 위험한데. 정현은 여와 맞닿았던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달아오른 양 볼을 식혔다. 살짝 붉게 달아올랐던 귓불이 제 색을 되찾을 즈음에야 정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의 옆에 섰다. 그래서, 그곳에 얽힌 추억 같은 것은 있나? 예를 들어 처남들을 빠뜨렸다던가. 자네는 도대체 나를 무어라 생각하는 건가?
부정적인 것도 아닌 살짝 변질하였을 뿐인-그러나 제법 비슷한- 소문을 두 사람 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현은 정현대로 다양한 종류의 소문에 익숙했고, 여도 마찬가지로 온갖 소문에 휩싸이곤 했으니, 둘 중 하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은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많다고 한들 젊은 날은 한 때인지라, 젊어서 놀아야 한다는 정현의 지론에 따라 둘은 일이 없는 날이면 늘 오전 수련을 끝마치고 둘이 오붓하게 검을 맞대기도 했고, 필부라도 된 모양새로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여가 자주 가는 찻집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는 악사를 부르는 대신 정현이 금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찻집 주인이 오랜 시간 동안 임을 그리던 두 분이 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기쁘기 그지없다며 눈물을 훔치는 모양새에 그제야 두 사람은 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지만 이 찻집 주인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아니, 그렇게 기뻐할 일입니까?”
“말도 마십시오, 공자님. 창천검께서 이곳을 들를 때마다 악사들의 연주를 한참을 듣고 가셨답니다. 그때 음악을 좋아하시냐 물으니 그렇다고 하셨다구요.”
“주인장, 그만, 그만하게.”
“부끄러우실 것 무엇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럼 이전까지 찾지 않은 이유를 여쭤봤더니, 이것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누구인가 싶었는데… 공자께서 연주하시는 것을 보니 공자님 이야기라는 것을 단번에 알겠더군요.”
찻집 주인은 그리 말하고는 다시금 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정현은 미묘한 멋쩍음에 볼을 긁적였다. 여는 차마 정현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듯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찻집 주인은 그럼 이만 물러나겠다고 말하며 뒷걸음질 쳐 방에서 나갔고, 순식간에 정적이 들어찼다. 크흠, 정현이 한 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제는 듣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게. 몇 날 밤이든 연주해줄 터이니. 목이 막힌 듯한 소리가 났다. 여는 애꿎은 찻잔의 결을 따라 엄지손가락을 몇 번이고 움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어 작게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대답에 정현의 숨통이 트였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금 선율을 자아내기 시작해서야 여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차가 식어 있었다.
그래. 두 사람은, 여는 몰라도 적어도 정현은 두 사람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면 즐거웠고, 제법 기꺼웠다. 전쟁이 갈라놓은 젊은 연인이 이립이 지나 불혹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 덕분에 그가 생각한 안 좋은 소문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안 그래도 평판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여와 무당파의 도사가 혼인하게 되었으니, 그대로 두었다면 무슨 소문이 생겼을지 구태여 상상하지 않아도 선명했다. 그래서 정현은 오히려 제가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도 했다. 염치라는 것은 무당산도 아니고 저 옛날 섬서에 고이 묻어두고 온 줄로만 알았는데 도인으로서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았으니 없던 염치가 가슴 속에 뿌리라도 내린 것인지 뒷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여가 먼저 거리를 좁혀 오면 당황해서 눈동자가 정처를 잃고 흔들리기도 했고, 단전께에 뭉근한 열기가 뭉치기도 했지만. 제 여인을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을 막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남궁의 여식이 고매한 도사를 꼬여내어 하산시켰다는 소문을 막을 수 있다면 제 부끄러움이나 저급한 욕망 따위를 내리누를 수 있었으니까. 십여 년 전에, 그리고 전장에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러했듯이. 그렇게 조금씩 소문이 부풀려져 두 사람의 관계 진전에 대해 두 파벌로 나뉘었던 것이 이제는 첫 만남 때부터 서로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는 종류로 바뀌었다는 것까지 정현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 소문을 제 예비 처남에게 들은 것이 불과 칠 주야 전이었다.
그런데 몰래 만남을 이어가다니?
정현의 의아한 표정에도 장신구를 소개해주던 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끄응, 하며 신음을 흘렸다. 창천검에게는 금이 안 어울리니 옥이나 은이 나을 것인데 하필 검괴는 은보다는 금이 어울렸다. 옥도 빛깔에 따라 다르겠으나 그렇게 된다면 둘이 한 쌍을 맞추는 의미가 사라지는 것 같아 고심이 끊이질 않았다. 미간에 내 천 자로 깊게 주름이 파이는 것에 정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제야 상인은 정신을 차린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창천검께는 은이나 옥이 괜찮을 것 같은데 구태여 따지자면 옥보다는 은이고, 대협께는 금이나 옥인데, 이 역시 옥보다는 금이라 말입니다. 물론 빛깔에 따라 다르겠지만 귀걸이나 목걸이일 경우, 대협의 머리색과 비슷하여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인장.” 정현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상인은 예? 하고 반문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은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창천검께 어울리는 것을 골라달라는 말씀이신 말씀이로군요! 제가 아내와는 중매 결혼이라 그것까지는 눈치를,”
“아니, 그것도 맞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 ……중요하긴 하지만.” 정현이 보기 드물게 횡설수설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해서 목을 가다듬고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고, 쌍을 맞추지 않아도 괜찮으니, 아여에게 어울리는 것을 생각해주면 좋겠네. 그리고 몰래 만남을 이어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정현의 질문에 상인은 눈을 끔뻑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상인은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문이 가득 찬 눈동자로 정현을 계속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대략 4년 전부터 밀회를 이어오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대관절 그것이 무슨,” 정현의 말이 곁으로 다가온 인기척에 뚝 끊겼다. 일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온 것인지 여의 머리카락의 바람결에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상인은 창천검까지 나타나자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고 입을 헤 벌리고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두 분께서 학사맹원에서 만나 정을 통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 마교의 발호로 인해서 두 분 다 제대로 서로에게 마음을 고할 수가 없었을 테고요. 여는 별말 하지 않고 상인에게 얼른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그제야 상인은 잊었던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곁에 제 정인이 있어 온화해진 것이었지,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상인이 급하게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려 하자 정현이 손사래를 쳤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인장. 편히 말하세요. 그 말에 상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 뒤에 전장에서 만날 때마다 감정을 쌓아 나갔는데, 사천혈사에서 류 대협께서 돌아가시지… 아니, 돌아가실 뻔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 병상을 털고 일어난 다음에 사랑하는 여인을 걱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안휘로 오셔서 생존을 알리시고, 그 이후 전장에서 만날 때마다 남들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는…….
“그, 잠시 멈춰보게.”
“예? 예.”
상인이 말을 멈추자 여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정현은 상인이 말해주는 저들의 날조되고 선동된 연애담을 즐거이 듣다가 안휘에 와서 생존을 알렸다는 말에 얼굴이 잠시 새하얗게 질렸는데, 지금은 평안을 되찾은 듯 얼굴은 평소의 혈색을 되찾았다. 아니, 조금은 붉은 것 같았고. 여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목을 가다듬었는데도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 이야기는 어쩌다 나오게 된 건가?”
“안 그래도 남궁의 자제분들께서 몇몇 이야기를 해주셨지 말입니다. 창천검과 검괴, 아니 류 대협께서 그리되실 줄 몰랐다고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완전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던데요?”
창천검대 사람이겠군. 그리고 정현과 자신이 청해 탈환 전투 때 다시 만났으니 그 이후에 정현과 만났을 때 같이 있었던 무인을 추리면 될 것이었다. 반쯤 내리감은 눈에 수많은 이름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정현은 그녀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입속말로 몇몇 이름을 읊는 등 여유를 잃어버린 여의 모습에 여유를 완전히 되찾은 그는 아까 전 상인이 물건을 치워 두어 텅 빈 가판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누가 보면 남의 연애사라도 듣고 있는 모양새였다. 계속 말해주시겠습니까? 정현의 부탁에 상인은 고개를 주억였다.
“예에. 그러니까, 다른 이들 앞에서 싸늘하게 대했던 것은 두 사람이 정을 통한 사이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창천검께서는 남궁의 무인들을 이끄는 사람이었고, 대협께서는 도사이시니, 전쟁 중에 이런 소문이 퍼지면 안 될 일이잖습니까.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최대한 숨기고 뒤에서 밀회를 이어가서 지금까지 반지를 제외하면 달리 교환한 것이 없는 것 아니십니까?”
그제야 정현은 상인이 왜 두 사람이 밀회를 이어 나갔을 것이라 단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문외한인 그라 한들 세가의 여식과 도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러니까, 신분이든 무엇이든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떳떳하지 못한 만남을 이어 나갈 때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단지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을 뿐이다. 세 명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던가. 이제는 즐거움을 떠나 없던 호랑이도 아니고 두 사람의 길고 다사다난한 연애사에 대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내는 것이 기가 차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현은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고는 목구멍 끝에 간당간당 걸려 있던 질문을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안휘에 온 것은 단순한 풍문이고?”
“4년 전에 오셨지 않습니까?”
“어땠을 것 같나?”
“에이, 잡아떼셔도 소용없습니다. 본 사람이 있는걸요.”
상인의 말에 정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상인은 문득 자신이 만담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객잔에서 사람들을 모아두고 했으면 철전이라도 몇 개 받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뒤따랐으나 언제 이야기의 주인공들 앞에서 이렇게 수다를 떨어 보겠는가. 심지어 두 사람 다 단순한 세가의 여식이나 무사 1이 아니라 이름 높은 창천검과 검괴인 것을. 그는 객잔에 자리를 잡아 이야기를 풀어놓는 만담꾼처럼 말문을 열었다. 성문을 지키는 장 씨가 그러길…….
동쪽 끝에 있는 안휘라 한들 정마대전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년 전, 사천혈사를 통해 사천을 탈환하였으나 중원의 타격은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허술한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200년이나 기척을 숨기고 살아온 마교도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중원 곳곳에도 불길이 번졌다. 안휘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한 차례 마교로 인하여 민가가 불탄 다음에는 밤이라 하여도 눈이 좋은 이를 성문 위에 배치하여 마교가 가까이 다가오면 즉시 관군과 남궁에 알릴 수 있도록 했다. 장 씨는 안휘성의 수많은 성문 중, 유독 호북과 붙어 있는 위치를 지키던 사람이었다. 언제 마교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라 한들 저번 전투 때 큰 부상을 입은 사람 대신 거의 온종일 보초를 서고 있던 그에게 수마를 이길 기력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장 씨는 제 시야에 보이는 것이 간간이 흔들리는 풀이나, 소동물 정도인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딱 일 각만. 반 시진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딱 일 각만 자고 싶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몸은 개운했다. 그는 늘어져라 하품하고는 아직 흐릿한 시야로 그동안 이상은 없었는지 확인했는데 새까만 밤하늘 아래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 씨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그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더욱 자세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문과 멀찍이 서 있던 사내는 기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한겨울이었고, 지난밤에는 눈이 내려 아직 땅에는 녹지 않은 눈이 새하얗게 쌓여 있었는데, 그 사내는 자다 깨어나 뛰쳐나온 사람처럼 새하얀 중의만을 걸치고 있었다. 길이가 엉덩이를 넘는 곱슬진 머리카락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으나 녹색인 것 같았고, 가장 이상한 것은 눈을 가린 천이었다. 마교는 아닌 듯해 장 씨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저 사내가 왜 이 야심한 시각에 안휘의 초입까지 온 것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의 소관이 아님을 알고 한시름 덜어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대략 일각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도대체 왜 들어오지도 않고 혹은 떠나지도 않고 저렇게 멀거니 서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발을 떼었다가 다시 바닥에 찰싹 붙이기도 했고, 손을 뻗었다가 힘없이 축 늘어뜨리기도 했다. 그것을 몇 번이고 더 반복한 뒤에야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래로 떨군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장 씨는 이 기이한 사내와의 만남을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았다. 그 사내와의 만남이 기이하긴 했으나, 장 씨는 그 이후 저 멀리서 마교도가 안휘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크게 종을 쳐 남궁까지 알린 일이 두어 번. 꾸벅꾸벅 졸다가 마교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해 급박하게 근처 보이는 움막으로 쳐들어가 잘 자고 있던 걸개 한 명을 붙잡고 안휘에 있는 모든 문파에 마교가 금방 들이닥칠 것이라 전해 달라 부탁한 것이 한 번, 그리고 그 자신은 숨이 턱 끝까지 찼음에도 가장 근처에 있는 문파들의 산문을 두드리고 목이 터져라 외쳐야 했던 일이 몇 번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나 아직 그는 밤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어두운 것을 견디지 못해 온종일 초를 켜고 지냈다. 사 년 전 어느 날 밤 만난 기이한 사내와의 만남은 끝나지 않는 불면과 함께 장 씨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별일 없었다면 눈을 가린 기이한 복색의 사내는 장 씨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테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들 살아가야 했던 장 씨는 아내를 도와 장도 보고 바깥에 나가 일을 처리하기도 해야 했다. 그렇게 번화가에 나가길 몇 번. 그는 사람들이 웅성이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모여있습니까?”
“장 씨 아닌가. 저기 보게, 참 잘 어울리지 않나? 곧 창천검과 검… 아니, 무당파 도사셨던 류 대협께서 혼인하신다는 모양이야. 둘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봤지?”
장 씨는 예에, 하고 말끝을 늘려 대답하고는 제 지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잘 보이지 않아 그는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쭉 내밀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남궁의 무복을 입은 창천검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인상이 딴 판이라 잠깐 당황하긴 했으나 왼뺨에 흉터를 지닌 남궁의 여인이라면 창천검 하나밖에 없으니 더 재어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붉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있었는데. 장 씨는 그를 보고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아마 확실하게 검괴 류정현일 사내의 얼굴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호북에 붙어 있는 성문에서 보초를 서긴 했으나, 호북에 가본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를 본 적도 없을 터인데. 떠오를락 말락 한 애매한 느낌에 그는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녘에 또다시 퍼뜩 깨어 휘영청 달이 뜬 하늘을 바라보고서야 떠올린 것이다. 그가 사 년 전 밤에 보았던 기이한 사내와 정현이 비슷하다는 것을 말이다. 며칠 뒤에 번화가로 나간 그는 삼삼오오 모여 창천검과 검괴에 대해 떠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슬쩍 발을 밀어 넣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 내가 하나 본 것이 있네.
“혹시…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상인이 말을 멈추자 가게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현과 여를 불안한 듯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를 마음대로 해서 화가 난 것인지 굳은 낯 하나 보이지 않던 정현의 얼굴도 썩 밝진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문제 되는 것은 없네. 시간을 오래 쓰게 해서 미안하군. 아현, 혹시 무언가 살 것이라도 있나?”
“아니, 괜찮네. 나중에 다시 오면 되지. 오늘은 직접 가서 가구를 보기로 하지 않았는가.” 정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아직 불안한 듯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상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내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게 되었군요.”
“어휴, 가당치도 않습니다. 편하실 때 들러주시지요.”
상인이 손사래를 치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정현과 여 또한 가볍게 목례했다. 살펴 가십시오, 하는 목소리에 그 둘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거리로 나섰다.
다른 이들이 기묘하게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사실 오늘은 신방에 들일 가구를 직접 확인하러 나온 참이었다. 사용인들을 시키거나 제 친가인 상단에 맡기면 되는 것을 여는 구태여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어 했다. 가구는 오래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더욱 두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먹이면서. 아무튼 이 하루의 여유를 내기 위해 여는 며칠 동안 정현과 남궁의 장원 내부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혼인하고 난 이후에 시간을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안휘의 곳곳을 소개해주고 싶었던 그녀로서는 낭패였다. 청첩장에 온 답장과 선물을 정리하고 또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반나절이 걸렸으며, 그들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검을 휘두를 때 쓰는 체력과 이것은 다른 것인지, 한 차례 편지와 서류로 가득 쌓인 종이의 산을 해치우고 나면 녹초가 되어 정현의 품에 늘어져 있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일을 끝마치고 겨우 시간을 내서 바깥으로 나온 참이었다. 직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싶다는 것 외에도 단지 안휘를, 그녀가 평생 살아오며 더없이 아낀 고향을 소개해주고 싶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앞으로 정현과 같이 살아갈 지역을. 그리고 그저, 평범한 사내와 연인들처럼 정현과 길거리를 걷고 싶었다. 날이 따뜻했고, 새파란 하늘은 더없이 청명했으며, 거리는 다양한 색채로 물들었다. 서른 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봄이라 더 그랬다.
여는 제 안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제대로 명명하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정현은 그녀의 모습을 연신 힐끔대고 있었다. 누가 보면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은 저들을 기다리는 가구 장인에게 향했고, 그 와중에도 용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상점에서 나와 남궁으로 향할 즈음에는 해가 서녘에 기울고 있었다. 평소라면 나온 김에 호숫가에서 저녁노을이라도 보고 가겠느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물었을 터이나 오늘은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돌아가는 것이 아쉽다는 양 걸음은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옷자락이 얽혔고, 가까운 거리 탓에 손등이 스쳤다. 약지에 낀 반지가 두어 번 손가락에 닿을 즈음 해서 여가 그의 손가락에 제 것을 얽었다. 정현이 몸을 움찔댔으나 맞잡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단어를 고르는 듯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이 일자를 그리더니, 이내 꾹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그때 자네는 죽은 사람이었고, 어떠한 자격으로 내 앞에 서야 할지 몰라 돌아갔다 했지.”
낮게 가라앉은 여의 목소리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힘을 주어 손바닥을 바투 붙였다. 그녀는 뜨거운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느낌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발걸음을 멈췄다. 정현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여를 돌아보았다. 노을 탓에 얼굴에 그늘이 져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한심한 사내라고 결혼을 취소하지는 않을 것이고, 여가 먼저 제 손을 잡아 왔으니 부정적인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았으나 긴장되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여,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아직도 닿지 못할 것 같고, 닿아서는 안 되는 존재로 느껴지나?” 그늘진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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